수행하면서

성지 순례기 ( 2 ) 캘커타 죽음을 기다리는 집 , 하우라역

Krishna4c 2008. 2. 22. 13:58

 

 YMCA 캘커타다 인도의 전통 가옥들은 이렇게 중정이 있다 .

 

 

방안 , 비교적 정갈했다.

 

 

네팔 영사분과 여행사 사장님 , 룸메이트였다.

 

 

 

숙소 옥상에서 본 캘커타의 공원

 

 

죽음을 기다리는 집 , 사진에서 보던 느낌과는다르게 아주 작은 곳이었다.

 

 

 

인디안 뮤지엄의 불상

 

 

 

스승님들과 인디안 뮤지엄 마당에서

 

 

 

 

 

하우라역 , 매쾌한 공기와 기차 소리 속에서 우린 짐을 쌓아두고 인도인들처럼 바닥에 앉았다.

 

 

인도다 인도다 해도 느낌이 없던 어제와는 달리 아침에 기도를 마치고 가 본 옥상에서의 경치는 내가 인도에 와 있음을 실감나게 했고 , 첫 느낌처럼 설레기까지 했다. 여전히 마음은 남편의 불편한 마음을 짐작하며 힘들었지만.

 

제일 먼저 우린 칼리가트로 갔다. 좁지만 많은 뿌자가 있는 칼리가트는 시바 링감을 따라 돌며 향을 올리고 쌀을 뿌리고 마른 물감과 꽃으로 뿌자를 하느라 북새통이다. 그리고 칼리가트니만큼 검은 염소들의 목을 쳐 피를 바치는 곳도 있어 선혈이 낭자하다.

그렇지만 거기서 뿌자하는 이들의 표정은 참 진지하고 뭔가 염원하느라 무겁게까지 보인다.

 

힌두교도가 많이 찾는 영험있는 곳은 우리 이교도나 이방인들에겐 늘 그렇게 혼돈과 불쾌감을 주는 곳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도 여전히 뿌자 재물을 파느라 복잡하고 또 구걸하는 이들이 널려있다.

그래도 이상하게 상쾌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 죽음을 기다리는 집 ]에 들어간다. 사진 속에서는 무지 넓은 곳인줄 알았는데 , 마치 모형을 보듯 작았다. 그리고 거기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도 한없이 작았다. 마치 막 낳은 아이나 막 낳은 참새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죽과 뼈만 남은 것 같은 이들이 많았다.

눈물 한 방울마저 사치로 여겨져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눈물은 눈가에 그렇게 머물렀다.

 

거기서 2년 이상 봉사한 조병준 선생이랑 만날 기회가 많은 터라 거긴 참 가보고 싶었었다.

봉사자들은 한없이 맑았다. 그렇게 행복해보일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못 찍은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인디아 뮤지엄에 가서 불교 유적들 옮겨온 것들을 보았다.

개인적으로 여행중에서 제일 재미없는 것이 내게는 박물관 구경이다. 살아있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 관련 전시물만 보고 우리 나라 민속 박물관 같은 곳 조금 더 보고 주로 정원에서 했볕을 쬐며 놀았다. 어제 하루 종일 비행기 실려와서 새벽 5시 예불 ( 시차 아무 상관없이 ) , 그러니 곤했다. 스님이 한 가지라도 더 말씀해주시는데 수신기 꽂고 그냥 존다.

 

그리고 자유 시간, 여행자 거리에서 인도 음식을 만난다. 서양식 바에 가까운 중국 음식점이었지만 음식은 인도식이다.

 

어메리칸 찹수이 , 완탕 � , 프라이드 라이스 , 스위트 콘 � .......

 

인도에 몇번 와 봤다고 나는 '인도 전문가'로 취급 받는다. 나도 캘커타는 처음인데......

게다가 안 끼던 수신기에 단체임을 표시하는 조끼와 이름표 , 사람들의 지난친 나에 대한 기대감 , 두고 온 한국의 식구들 때문에 마음이 힘들다.

 

그리고 거리를 돌고 과일들을 흥정하고 무갈사라이로 가기 위해 캘커타 하우라역으로 간다.

 

역은 컸다. 그리고 혼잡했다. 그러나 거기에 묘한 질서가 있었다. 먹을 것 집들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커피와 작은 야채 피자를 사고 나니 페티가 보인다. 패티를 먹을 걸 ....... 나는 이제 인도 음식들이 맛이 난다.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하지만 사람들은 입을 댈 용기도 호기심도 없어 보였다. 특히 인도가 처음인 이들은 완전히 넉다운 상태다. 인도의 거리와 냄새와 사람들을 보며 정리가 안되고 일정은 인도지만 한국식 이상이라 지쳤다. 다들 . 거기다가 부처님 나라가 왜 이모양인데 부처님은 뭐하시나 하는 기복적 신앙을 버리지 못한 정토회 멤버나 정토회 밖 사람들은 그 인상이 완전히 죽을 상이다.

 

그리 지쳐도 우린 짐꾼을 쓸 수 없었다.

제 힘으로 제 일을 해보는 것이 법륜 스님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늘 마스크를 끼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코 속에 손가락 넣어보면 아주 새까맣게 먼지가 묻어난다.

 

베낭을 지고 간 나는 그 큰 둥치를 짊어지고 힘이 들었다. 벌써 몸이 박신박신한 느낌이 든다. 딱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거나 독한 소주 털어넣으면 좋을 것 같은데 , 인도는 정해진 곳 아니면 술을 팔지 않았고 ' 순례'에 의미를 두다보니 여행의 필수품 팩 소주도 챙기지 못했다.

다른 이들도 심지어 법사님도 술이 고프신 것 같았다.

 

 기차 슬리퍼 내 자리를 찾아가느라 100미터 이상은 어둠과 두려움 속에 걸었다. 영어로 표시된 기차칸을 찾기가 무지 힘들었다. 다들 힘들고 내용을 아는 실무자들은 보이지 않으니 그냥 간다. 인도는 네번째지만 두려워서 한 번도 안 탔던 기차였다. 그런데 해보니 그냥 할 만 한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깨달음이다. 이제 앞으로는 인도에서 어떤 교통 수단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이트 버스는 이미 2년 전에 타 봤다.

 

 기차 안에서는 노말한 기차 높이에 3칸이 질러져 세명이 잔다. 허리를 펼 수 없는 높이다. 지쳐 사진 찍기도 싫다.

 

 김홍신 작가와 법륜 스님이 바로 옆칸이었지만 보이지 않으니 스르륵 잠든다. � 늦게까지 스님의 들뜬 목소리와 김작가의 목소리 신도들의 웃는 소리가 난다.

 

 인도행에서 있었던 여러가지 에피소드였을 성 싶다. 아쉬웠지만 내 몸음 이런 힘든 단체 여행에 맥을 못추고 잠에 빠져들었다.

바라나시를 가기 위해 그 외곽인 무갈사라이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