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순례기 ( 9 ) - 룸비니 , 카필라성 , 쿠단
바이샬리에서 룸비니로 가는 새벽
드디어 룸비니로 이동이다.
네팔 땅이라 정말 그리웠다. 산이 있고 보고픈 이가 있고 .......
마치 순례 기간 내내 이 때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와 네팔 국경인 소나울리로 이동해서 3일짜리 웰컴 비자를 받는 동안 조별로 흩어져 아침 식사를 했다.
길거리 짜이 집 평상에 밥을 푼 조도 있고 작은 거리 식당을 빌린 조도 있었다. 나는 2호차여서 국경 도착이 늦었다. 순례 기간 전반부는 2호차여서 늘 스님 뒤에 붙어 다닐 수 있었는데 , 뒷 차 사람들의 항의였는지 아님 원래 그렇게 하기로 했는지 10호차부터 출발하여 우린 거의 마지막에 도착했다.
웬만한 식당은 다 점유되어 갈 곳이 없었다. 이제 막 동이 튼 터라 작은 국경 마을 소나울리는 우리 순례단으로 해서 아침을 맞는 듯 했다.
내가 호텔 부속식당들을 제안했고 이 곳 저 곳 아침 밥 먹을 곳을 찾다가 , 우리 조 거사 한 분이 넓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호텔 식당을 찾아냈다.
연속 며칠을 새벽에 나와 야밤에 들어가는 강행군이었던 터라 편안한 식당이 좋았다.
작은 문 하나 건너왔을 뿐인데 , 네팔은 인도와 또 달랐다. 예전부터 네팔과 인연이 있던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다들 그렇게 편안해할 수가 없었다.
네팔 산골짝 사람들이 우리랑 비슷하긴 하지만 이 곳은 인도인과 거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눈빛이 편안했다. ' 빨리 빨리 '를 외치며 우린 이 것 저 것 마구 주문했다. 카운터의 주인장도 주문 받는 이도 정신없어 했다. 싸 가지고 온 밥솥의 밥을 풀고 반찬을 풀고 지범 지범 하고 있는데 , 찔끔 찔끔 나온다. 모이라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고 , 빈그릇 운동을 해야하는 터에 사람들 원하는 대로 이것 저 것 시킨 나는 걱정이 슬슬 밀려왔다. 다 못먹고 나가면 어쩔 것인가?
그러나 적당히 몇개가 안 나왔고 계산을 하니 인도 루피보다 30% 정도 싼 네팔 루피를 인도 루피로 계산하니 공짜로 먹은 듯 미안했다.
룸비니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그리고 네팔 정부가 성역화 사업을 하고 있음에도 먼지가 장난 아니었다. 아주 화려한 남방 국가들의 절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룸비니 지역은 이제사 절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제 시멘트로 모양이 잡힌 한국의 [ 대성 석가사 ]의 규모가 제일 컸다.
성지 성약화 작업을 하라는 용성진종 조사의 유훈이 법륜 스님의 은사 스님이신 도문 스님까지 이어졌고 법륜 스님과 같이 수행하신 법신 스님이 불사를 하고 계신다고 했다.
룸비니 동산에 도착하니 큰 공원 같았다. 곳곳에 마하 마야 부인이 가지를 잡고 아이를 낳았다는 아� 트리가 있었다. 큰 보리수 나무에는 티벳탄 불자들이 틸리초를 걸어놓아 성스러운 분위기 대신 티벳 절 어디를 방문한 느낌이 났다.
부처님의 탄생지로 여겨지는 곳에 참배를 했다.
마하 마야 부인처럼 아� 트리를 잡고 ( 산기를 느끼고 이렇게 웃으시진 않았겠지만 )
부처님이 '응애'하고 세상에 오셨을 것이라는 곳
한없이 편안한 곳이었다. 눈을 감고 녹야원이 있었다는 시절을 상상하니 바람이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차로 이동하기 위해 나오는데 뒤 따르는 걸인들이 한국말을 제법 잘 했고 " 석가모니불 "을 염불처럼 외는 눈치 빠른 소년들도 몇 있었다.
동산 맞은 편에 기념품 가게들로 몰려들 갔지만 부처님이 29세까지 지내신 카필라 성으로 가야해서 다들 차에 올랐다.
좁은 길에 인도 관광버스 10대가 나타나니 신기해서 보는 이들 , 일어나는 먼지 때문에 불쾌한 얼굴을 하는 이들 , 경계의 눈빛을 한 이들 등 다양한 얼굴들이 스쳤다. 몇 달 전에 인도에서 있었던 힌두교도와 회교도의 분쟁이 네팔의 이 마을까지 영향을 미쳐 과격한 이들이 인도의 관광버스 한 대를 불 태운 적이 있다고 스님은 지극한 조심을 명하셨다.
카필라 성은 현재는 조금 규모가 있는 숲으로 남아 있었다. 그냥 그 곳에 ' 동문 터 ' ' 북문 터 ' 이런 낡은 팻말만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 곳이 한없이 편안했고 쑤욱 빠져드는 느낌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닫기 전이나 후를 막론하고 가장 오래 지내셨던 곳이다. 어찌 그 분의 숨결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
게다가 나는 부처이신 석가모니가 아니라 ' 인간 고오타마 싯타르타 '를 만나는 것이 더 절절했다.
카필라성 동문터
아쇼카 왕이 세운 탑을 참배함
부처님이 뛰어 놀았을 성 터에서 우리도 놀았다.
부처님이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뜬 어머니 마하 마야 부인을 그리워 하며 자주 나와 앉았었다는 동문 터에 앉아 몇 곡 불가를 불렀다. 참 편안하면서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울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 문에서 출가를 하셨다.
따라다니는 동네 아이들은 인도 아이들에 비해서 다들 깨끔했다. 이쁜 애들 몇몇을 보면 내가 혹시 그 옛날 사랑했던 이와 결혼을 했더라면 저런 아이가 나왔을까 하면서 자꾸 눈길이 갔다. 그 때가 언제라고 아직도 그 사람이 그립단 말인가?
참 좋은 곳이었고 볕도 바람도 적당한 곳이었지만 아들 석가모니를 아버지인 정반왕이 마중하러 가서 만났던 쿠단으로 향했다.
불교 성지인 탑의 꼭대기는 힌두교 성물인 시바 링감이 놓여있다. 불교 성지 어디든 사정은 같았다.
성도하고 고향인 카필라바스투로 돌아오는 부처님에게 정반왕은 아버지로 성에 들어올 것을 권하지만 아들 붓다는 우리 가문의 전통은 '걸식'이라며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며 이제 완전한 수행자가 되었음을 알린다.
그래도 부모인 정반왕은 아들을 만나러 성을 나와 이 곳 먼 곳 쿠단까지 나온다. 참 아리다. 인간 붓다에게만 더 마음이 간다.
부처님이 부모님들의 종족인 석가족과 꼴리족이 물싸움을 벌이자 그 것을 막고자 강 한 가운데 앉은 채 떠서 나타났다는 로히니 강변에서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예를 올렸다. 법구경에 있는 ' 로히니 강변의 물싸움 ' 편을 독송하니 옛날 얘기를 들은 듯 추억의 영화 한편을 본 듯 즐거웠다. 그리고 1-2 센티미터도 안될 것 같은 풀 속에 그 보다 더 키 작은 꽃들이 숨어 있었다. 마른 잔디같은 풀 속에 깨알만씩한 꽃들이 지천이었다. 참 아름다운 곳이었다.
신통을 쓰지 마라고 하신 부처님이시지만 부모의 종족이 가뭄에 물싸움을 벌이며 살육을 하려할 때는 딱 들어서 신통을 보이시고 그 다음 설법을 하시어 물보다는 피가 중함을 일깨우신 것이다.
그리고는 이제 대성 석가사로 갔다. 우리 일행을 위해 뜨거운 물이 콸꽐 나오는 목욕실도 서둘러 오픈하시고 마당에 300여명이 식사할 곳도 마련해두었고 식기도 그득히 쌓아놓으셨다.
저녘 이후 법회 때 법신 스님이 '보일라 법문'을 하셨다. 길을 만드는 토목공학 전공자들이 '또라이' 같다고 입을 여시더니 뜨거운 물과 음식이 없어 죽어가는 네팔 사람들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솔직 담백하고 전혀 꾸밈없는 스님에게 반해버렸다. 룸비니를 다녀온 지인에게 참 독특하고 꾸밈없는 분이라 또 뵙고 싶다는 얘길 들었던 터인데 , 법륜 스님과 도문 스님 밑에서 공부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기 가진 것대로 풀어서 살 되 누구에게도 손가락질 받지않고 존경받고 존중받는 승려로 살아가는 두 분 법륜 스님과 법신 스님과 인연이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生이라는 것을 느꼈다.
저녘에는 대성 석가사 마당에 장마당이 펼쳐졌다. 그냥 좀 더 주어도 될 것을 장사치들에게 야박하게 흥정을 했다. 보기 좋은 부처님 상호 모시고 몇몇 기념품들을 샀다.
내일 새벽에는 히말라야가 보이는 탄센으로 간다.
마음의 들뜸을 가라않히며 잠이 들었다.
( 역시 오밤중에 들어가고 새벽에 나오는 바람에 대성석가사 사진이 한 장도 없습니다. )